Archive for December, 2008

정줄놓 7; 혼을 파는 블로그

Monday, December 15th, 2008

이번에는 링크가 없다.

티옴니아라는 전화기가 있다. 삼성의 야심작인가 보다. 생각 같아서는 이번 위피 및 아이폰 국내 출시 무산 ((무산으로 부를 수 있을만큼 뭔가 일이 있었다는 확증은 없으나 정황상 그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도 옴니아의 ‘전지전능’함의 발현이 아닐까 싶다.

http://t-omnia.anycall.com/

이렇게 블로그를 몇 개 모아 광고도 한다. 그러고보니 소위 ‘힘 쓰는 블로그들’이 주로 나열되는데 그동안 RSS로 구독하던 블로그가 다수 들어 있다. 들어가 보니 ‘T옴니아와 함께하는 블로그’라고 배너도 달아 놓고 있다. 어느 블로그는 옴니아와 함께 하는 두 달이라면서 치우치는 리뷰를 쓰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도 하고 그러더라.

결론? 이 블로그들 다 지웠다, RSS 목록에서. 일단 정당하다. 자신의 블로그에서 뭔 일을 하든 무슨 상관이랴. 옴니아를 선전하든, 씹어대든 자기들이 결정하고 발표하는 일일 뿐.

블로그는 뭔가. 길게 쓸 여유는 없고,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발행’ 형식으로 올리고 어딘가에서 그 정보를 쉽게 얻고 찾아주는 ‘구독자’들이 소통하는 2000년대 소통의 형식이라고 하면 어떨까 싶다. 결국 두 당사자가 있어야 블로그가 성립이 된다. 독자가 하나도 없더라도 일단 ‘발행’이라는 의미는 상대방을 염두에 둔 행위이다. 그게 아니라면 일기장에 손으로 쓰거나 비밀 글로 자기만 보면 될 일이고.

‘파워 블로거’는 누가 붙여주는 이름인가. 뭐, 그것도 좋다. 업체가 붙이든 단체가 붙이든 누가 붙이든 (비교적) 객관적인 수치를 앞세워 줄을 세워 보겠다는 것이니 뭐라 할 도리가 없다. 어디서나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법이지. 고여있는 질서와 법은 없잖은가.

그런데 불편하다. 어느 날 약속이나 한듯(사실 약속한 거지) 짜잔~ 박스 풀어 제끼며 일제히 어쩌고 저쩌고 하며 뽀얗게 사진들 올리는 폼이 말이다. 하나 묻자. 대가는 뭔가? 쓰던 옴니아는 리뷰어에게 귀속하는 게 일반적 관행 아닌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수 없이 많은 물건이 그냥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 다니기도 하긴 하지만, 어쨌든 ‘사례’, ‘감사’의 인사, 좋다. 또 뭐 받니? 애초에 그런 블로그가 아니었다면 지금이라도 ‘자진신고’ 하길 바란다.

Engadget하고 뭐가 다르냐고? 인가젯에서 리뷰 올리면 그냥 그러려니 한다. 도리어 더 객관성이 있다고 생각하지. 걔들도 분명히 리뷰 물건 챙길지도 몰라, 하면서도 말이야. 왜냐고. 거긴 원래 그런 데잖아. 걔들은 영업 하는 데라고 선언하고 시작한 것이지. 헌데 순진하고 부지런한 개인으로 ‘위장’된 우리 ‘빠와 블로거’들은 그런 면은 슬그머니 뒤로 빼고 그냥 ‘개인인데요, 객관적이 돼 볼게요’ 하면서 순진한 독자들 기만하는 거 아니냐는 거지. 얼토당토 않은 ‘국내 1호 전업 블로거’라고 선언했던 누구보다 더 웃긴 거 아니냐는 말이다. 차라리 그 ‘선언’은 “왜 이래, 아마추어 같이.”라고 말은 들을 지언정 자신의 본질은 밝히고 시작했거든.

“누구냐, 넌!” 내가 묻고 싶은 것이 이거야. 혼은 팔지 말라고. 괜히 오해 사기 싫으면 확실히 정하든가. 네 블로그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말이야.

정줄놓 6; [만물상] 영어와 일본인

Friday, December 12th, 2008

일본 메이지유신 주역으로 초대 문부장관을 지낸 모리 아리노리(森有�)는 외교관으로 영국·미국 등에서 살았던 경험을 토대로 1873년 ‘일본의 교육’이라는 책을 썼다. 그는 서문에서 “일본어를 없애고 온 국민이 영어를 배우자”는 파격적 주장을 폈다. 추상어가 부족하고 한문에 너무 의존하는 일본말을 갖고선 서양 문물을 도저히 일본 것으로 만들기 어렵다는 얘기였다.

▶자유민권사상가 바바 다쓰이(馬場辰猪)가 모리의 ‘영어 공용론’을 반박하고 나섰다. “영어가 일본인을 두 계급으로 분열시킬 것”이라고 펄쩍 뛰었다. 영어를 쓰는… [From [만물상] 영어와 일본인]

과거 일본, 그것도 아주 먼 옛날 얘기를 읽고 있자니 요즘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런 엉터리 주장이 부끄럽고 나아가서 우리는 어째 이제야 하게 되었는지, 참담한 심정이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 때 주장했던 내용을 우리는 지금, 오늘날 ‘지껄이는’ 자들이 있다니 말이다.

히로부미 얘기와 이번 노벨상 수상자 도시히데 얘기를 섞어서 이상한 결말로 이끈다. 영어 공용화론에 이어 일본을 이끌어 간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영어로 인해 참담한 경험을 하고 후회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신문사의 기자란 자의 논리가 참 가당찮다. “평생 외국도 못 나가 여권도 없었다.”라고 적고 있다. 평생 외국을 나가지 않아 여권조차 없었다라고 했다면 나았을까 모르지만, 어쨌거나 저런 기본적인 논리 전개도 못 하니, 바로 오늘 우리 사회의 ‘기자 양반’, 그것도 1등 신문 기자답다.

이어 이 ‘기자 양반’은 일본 명문대 정치학과 학생의 발음을 문제 삼는다. 그러면서 황급히, 허겁지겁 세 문장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마무리 짓고 만다. 그나마 이전까지는 어디서 본 내용을 근거 삼아 얘기하지만 마지막 세 문장은 그저 자신의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 뺨을 치는지, 큰 코를 누가 다치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도 한번 감상과 ‘전하는 말씀들’에 의존해서 얘기해 보자. 12년 만에 온 미국은 어러모로 달라진 모습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일본인들을 볼 수 없는 게 가장 큰 일 중에 하나다. 듣기로는 일본인들은 무리 지어 다니지 않아 눈에 잘 띄지도 않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대거 일본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캘리포니아에서 오래 산 현지 주민들의 증언이니 근거치로는 박약하다해도 최소한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난 사실을 전해줘서 생생한 현장경험으로 들렸다. 이유야 어찌됐건 난 여기서 일본인을 본 적이, 그간 넉 달동안 한번도 없다. 내 동선이 아주 짧은 그저 학교와 집을 오가는 수준이지만 말이다.

히로부미 시대야, 근대화의 초기니 미국 문물을 위해서 영어 하는 사람들을 육성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헌데 하나 묻자. 그 ‘몰입학교’가 지금 우리처럼 수십 대 일 경쟁률의 ‘그들만의 리그’, ‘두 계급을 나누기 위한’ 학교였는지 말이다. 도시히데도 그렇다. 그가 노벨상 씩이나 받아서 해외에 나가 그동안 못 누린 호사를 누렸는지 모르지만 자신의 언어로 충분히 학문을 세워 결국 노벨상을 받을 정도가 됐다는 사실과 그런 기반이 이뤄진 일본의 환경을 먼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그가 일본말로 강연해도 좋을 노벨상 수상자 강연 아니었을까. 그의 연구 경험을 얻기 위해 거기 모인 사람들이 궁금함을 이기지 못해 질문을 하더라도 당장 일본어를 배울 수는 없고 일일이 통역을 거치기도 어렵고, 무엇보다 영어를 ‘내지르면’ 다 알아들어야 하는 이상한 국제적인 힘자랑 때문에 그가 당혹했던 건 아닐까? 그가 “반쪽”을 언급하면서 혹시 눈가에는 슬며시 웃음이 묻어 있지는 않았을까?

우리 현실이 근대화 초기의 일본이라면 혹시 모르겠다. 정보를 얻을 수도 없고 도시 영어를 하는 자도 없어 나라가 꼭꼭 문이 닫혀 우리끼리 우물 안 개구리마냥 하늘만 쳐다보며 사는 때라면 혹 모르겠다. 해도해도 다 할 수 없는 우리 말로 된 학문 성과를 더 널리 알리고 싶어서 영어를 익혀 더 널리 세상을 위하자는 큰 의지가 있다면 또 모르겠다.

이 준 논설위원. 도대체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은 뭔가? 정신 줄은 일찌감치 놓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도대체 당신이 그 줄을 놓고 대신 잡은 줄은 뭔가? 혹 국어로 하는 논리 전개가 박약한 것으로 미뤄볼 때 당신이 잡은 줄은 ‘영어 발음 줄’, 혹은 ‘퇴직 후 명함 찍어 영어 힘자랑 강사할 줄’ 정도는 아닌가?

못 알아 들을테니 분명히 말해 준다. 영어 몰입 교육. 웃기시고 있지 좀 마라, 제발. 정말 머저리 같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대꾸할 가치가 있어야 뭔 논리라도 섞어줄텐데 그냥 답이 없다. 그래도 발행하는 글이니 하나 더 묻는 걸로 끝낸다. 그래서 얻는 게 뭔데? 왜 질문만 하냐고? 이게 지금 내가 수천 만원 들여 배우고 있는 그 소위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이란다. 답하는 자 스스로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진리의 길로 스스로 다가갈 수 있는 것이란다.

일본인 네 명이 노벨상을 받는다지. 참 부럽다. 참, 고 은, 황석영이 노벨상 후보로만 언급되고 수상을 못 하는 이유를 혹시 그들이 작품을 영어로 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지금 상태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로 보이니 말이다.

ps. 이 준. 이렇게 외자 이름은 성과 떼어 쓰는 게 맞는단다. 당신 이름이나 좀 잘 쓰고 논설이니, 기사니 해 주기 바란다. 꼭 이럴 때 한글은 맞춤법이 어렵다고 하지? 맞춤법 안이 언제 개정됐는지도 한번 알아보기 바란다. 10월 9일이 빨간날인지 아닌지 정도에 관심을 갖는 조선일보가 아니길, 진심으로 바란다.

정줄놓 5; LG goes insanely retro with Franklin Planner branding on SU100 phone – Engadget

Monday, December 8th, 2008

[From LG goes insanely retro with Franklin Planner branding on SU100 phone – Engadget]

세 가지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있다.

  1. 얘들이 프랭클린 플래너를 “insanely retro”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점. 과연 얘들이 특정한 ‘긱’일 뿐이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보통 미국 애들이 그렇게 생각하는지, 즉 보편타당한 21세기형 전화 단말기에 프랭클린 플래너가 영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는 ‘잠재적’ 젊은 ‘소비자’군의 의견을 얘들이 대표성을 띄고서 발언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 확인되어야 한다. 하지만, 인가젯은 사실 국경을 넘어선 꽤 유명한 긱 블로그라 생각해 볼 때 나름 LG가 불리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지 않을까.
  2. 제품 발표에 여성을 쓰는 것이야 뭐라 하겠느냐마는 달린 댓글을 보면 LG 브랜드에 굳이 좋은 영향은 아닐 것이라는 점. 또한 나아가 한국이라는 가치에 대해서도 별로 좋은 영향이 아닐 것이라는 점. 차라리 좀 멋진 이미지 사진이 낫지 않을까? 인가젯에 올라오는 많은 한국 제품 중에 저런 개념으로 홍보 사진 찍은 게 많다고 생각되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3. 결국 LG는 정신 줄을 놓고 있다는 점. 이건 위 출처와 상관없는 나만의 지적인데 위 1, 2번을 곰곰히 되새겨 봐도 다른 결론이 안된다. 잘 만든 제품을 왜 저리 이상한 길로 몰아가서 결국 스스로 바보가 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 이래저래 고생하고 아이디어 짜내어 개발하는 기술진들이 불쌍하다고 생각 됨. 제발 기술자들이 대접받는 사회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위 사례는 하나의 예로서도 훌륭한데, 도무지 기획과 마케팅 등 ‘먹물’만 잔뜩 들어 있는 애들의 일하는 폼이 영 도움이 안 돼 보인다.

끝.

정줄놓 4; 서울법대 출신은 성골, 비법대는 진골?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Thursday, December 4th, 2008

[From 서울법대 출신은 성골, 비법대는 진골?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이거 뭐야. 서울신문이 이제는 연합 뭐 그런건가. 이렇게 서울신문 기사를 ‘받아’ 쓰나, 조선일보?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81204009004#

아래 ‘정줄놓 3’에서는 패러디의 정의도 모르는 조선일보와 기자에 대해 썼는데 위 조선일보 기사는 작성자도 없다. 최소한 창피한 줄은 아는 것이거나 인터넷 조선일보 등으로 분화된 내부 구성원이 그냥 막 올리는 것 중 하나일 게다.

서울대, 법대, 성골, 진골. 제목 장사가 뻔하다. 그럼에도 그나마 남 신문 기사를 복사한 듯 붙여 놓고 있다. 대단하다. 뻔뻔한 건가, 용감한 건가. 저작권 침해라고, 조선일보야.

다음은 기사 내용 자체 문제. 몰랐나? 로스쿨 법안 보면 타교 출신은 30% 이상 뽑아야 하는 게 명시 돼 있다. 호, 생각해 주는 것 같지? 아니거든. 반대로 본교 출신은 70%까지 뽑아도 된다는 말이잖아. 후배 하나가 지금 원서 내 놓고 기다리는데 일찌감치 말 한 적이 있다. 이거 지금 서울대 법대 막 졸업했거나 막 졸업할 애들이 가장 앗싸할 경우라고. 교수 입장이 돼 보라고, 누굴 뽑겠느냐 말이다. 총 국내 정원의 80%가 3년 후 변호사 타이틀을 얻는, 그런 (기존 시스템에 비하면) 거저 먹는 시장이다. 이번 50회 사법 시험에는 무려 9년 여를 신림동에 바쳐 온 선배 하나가 비법대 출신으로 마침내 합격했다. 헌데 이건 3년이면 되는 거거든.

존재감 없는 곳이어도 ABA 인증 학교라고 여기는 시험 볼 때 철저히 한다. 학생 이름 못 쓰게 하고 번호 나눠주고 답안지에 번호 쓰라고 한다. 면접? 서류만 내면 그걸로 심사한다. 우리 아직 대면 면접 하지? 과거 비슷한 면접 경험을 무려 세 번이나 해 봤다. 무시무시한 학장님 방안에 들어가면 오직 법과 신념으로 가득해 보이는 교수님들이 내 프로필을 담은 종이를 일제히 주르륵 넘긴다. 오금이 저리지. 그리고 얼굴 보고 물어 본다. 왜 간판 따러 왔나? 이렇게 물어 본다 (난 다른 질문 받았는데 당시 같이 면접 보던 애들 하나같이 얼굴이 허옇게 질려서 나왔다, 저 질문 받고). 면접 기법이라고 강변할 지 모르나 웃기는 소리다.

문제는 사람이 아니다. 시스템이지. 리트 시험 보고 서류 내면 끝이어야 한다. 사진 붙이지 말고 가족 중 누가 법조계에 있는지 물어 보지 말고 왜 법대에 오고 싶느냐는 질문에 아는 사람이 인도해 줬다 얘기할 때 ‘오, 법조계에 누가 계신가?’라고 다시 묻는 질문에 ‘아니오, 아내가 말했는데요’ 라고 할 때 뜨악해 하지 않을 그런 상황. 그런 상황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몇 천 만원 쓰고 3년 후에 80%의 확률로 변호사가 된다. 싫은가? 난 공부는 잘 해도 서울대는 안 갈거야라는 치기 어린 고등학생이 아닌 이상 누가 이 제안을 싫어하겠는가. 달러 빚이라도 마다하겠는가. 게다가 급제한 마냥 어화둥둥하는 엘리트들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말이다.

제길, 교수님들이 프로필 주르륵 넘길 때 문 앞에서 분명히 대학원생 한 명이 서 있을 거다. 들어오라는 사인을 기다리고 면접자들을 통제하는 임무를 지닌 자다. 그 찰나의 순간, 그러나 면접자에게는 영겁의 시간처럼 긴 그 순간. 그 안에서 어떤 대화가 오가는지 우린 모른다. 혹시 아나. ‘어, 김 교수. 얘 그 방 애 아냐?’라고들 확인 하실지. 오해 받기 싫거들랑 갓끈은 집에서 안 풀리게 매고 나오자는 말이다.

원론으로 돌아가서, 조선일보. 신문답게 굴어라. 학교 다닐 때 말로만 공부하는 애들 못 봤나? 1등이라고 네 입으로 말하는 건 좋은데 좀 1등처럼 굴어야 뒤에서 욕한들 앞에서 ‘킹왕짱’이라고 해 줄 거 아니냐고.

ps. 이번 웹 화면 개편은 좋았어. 보통 이런 건 중앙일보가 잘 하는데 거긴 아직 멀었고. 그 네이버식 3분할 화면은 누구 생각인지 몰라도 아주 별로였거든. 정신 없고 집중 안 되고. 뭘 말하고 싶은지 알 수가 없잖아. 광고만 잔뜩. 다음 개편 때는 그 자랑스런 너희 이름 위에 광고 올리는 짓은 좀 하지마. 1등은 말로만 되는 게 아니고 기품과 자존을 지킬 때 이뤄지는 거잖아.

정줄놓 3; ‘미네르바 자술서’ 알고보니 ‘패러디 칼럼’

Wednesday, December 3rd, 2008

파이낸셜뉴스 곽인찬 논설위원이 2일 인터넷 논객으로 유명한 ‘미네르바’가 자신이라는 내용의 칼럼을 내보냈으나, 이는 미네르바를 패러디한 칼럼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곽 위원은 2일 파이낸셜뉴스의 ‘곽인찬 칼럼’을 통해 ‘미네르바 자술서’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고 자신이 미네르바라고 밝혔다. 이어 “자수한다. 내가 바로 그 … [From ‘미네르바 자술서’ 알고보니 ‘패러디 칼럼’]

패러디가 뭔지 굳이 정의를 하고 싶지도, 링크를 걸지도 않는다. 논란인지 모르고 구글 뉴스에서 읽다가 “패러디”라고 당당히 말하길래 어이가 없었는데 조선일보에서도 저렇게 전하고 있다.

미친거 아닌가. 저런 자들이 기자라고, 또 저런 자들이 동업자 의식인지 가지고 저렇게 감싸대고 하니 도무지 갈피를 못 잡는 사회처럼 보이는 게 아니냐 말이다.

칼보다 센 펜을 휘두르는 자들 아닌가. 한 글자 한 글자 목숨을 걸고 써야 하는 거 아닌가. 글 한편에 자신이 쌓은 그동안의 인생을 모두 걸 수 있을 정도로 치열해야 하는 것 아닌가.

특히 조선일보를 위시해서 자칭 부수 좀 낸다고 하는 신문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먹고 사는데 다들 어렵구나. 위 아래 따로 없다.’ 가끔 왜 신문들이 불과 몇 개월 전 논조와 다른 얘기를 쓰냐고 비판들을 하는데 그 논조라는 게 다른 게 당연하다. 저들은 소속 언론사 안에서조차도 ‘우리’나 ‘논조’ 따위를 걱정하지 않는다. 그저 그 때 그 때 상황에 맞는, 어떻게 하면 그 속에서 살아 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 때 그 때 상황을 모면하고 줄을 타고 하는 데 관심이 있을 뿐이다. 오늘은 누구를 후려 볼까, 무엇을, 어떤 저녁을 얻어 먹을까, 술집은 강남인지 강북인지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 오직 기자 자신, ‘나’만 존재할 뿐이다.

그런 자들이 자기들 소속 회사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걱정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름 걸고 찍어 낸 소속사의 논조와 다르게 오늘도 내일도 컬럼입네, 사설입네, “패러디”입네 하면서 부끄러운 줄 모르고 쓰레기 활자만을 양산해 내고 있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것이 기자들만의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법을 다루는 고귀하고 신성한 어디어디도 그렇고, 방송도 마찬가지고, 힘 좀 쓰네, 방귀 좀 뀌네 하는 자들의 작태가 바로 이것이다. 그것이 오늘의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갈피를 못 잡는 게 아니고 안 잡는 것이고 그럴 의지와 관심이 없다. 오로지 자신의 안위와 내일만 걱정할 뿐이다. 자기 과거도 관심을 끊고 싶을 ‘뿐이고’!

얘기가 이상하게 흐르는 것으로 느끼실 지 모르지만, 왜 우리 나라에 애플의 iTS가 안 들어올까를 생각해 본다. 최근에 가진 생각은 ‘표준’의 문제다. ‘표준’의 부재. 과거 독재로 그 표준을 강요하면서 우선 성장을 강조하고 자신들만의 표준과 나눠먹기로 일관한 사회가 그 관성을 못 버리고 여전히 그렇게 기형적인 ‘표준’을 붙잡고 있다. 사회 어느 구석에서도 온 구성원이 합의하고 이끌어가는 표준이 없다. 이해하기 쉬운 가까운 예는 위키피디어. 우리 성정에 안 맞아 그렇다고? 아니다. 표준에 대한 합의와 구성원들의 관심이 없어서 그렇다. 그거 해서 뭐 하는데라는 생각이 당장 들지 않는가. 표준은 그런 게 아니다. 갖춰 놓으면, 누구든 먼저 표준에 대한 생각을 하는 순간 힘이 생긴다. 그런데 우리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중소기업의 표준은 대기업에 먹히기 일쑤고, 보통 사람들의 표준은 힘 있는 자들의 말도 안 되는 표준에 억눌리기 일쑤다. 합의도 협의도, 논의도 토론도 없다.

이런 사회를 바라보는 외부의 생각을 상상해 보자. 당연하지 않은가. 왜 우리의 표준을 저들이 관심을 갖고 구축해 줘야 하는가. 그들은 그저 바라볼 뿐이다. 만들어 내라고, 갖추라고 할 뿐이다. 표준 얘기는 나중에 좀 더 써 보자.

사회의 공기이고 표준 중의 표준이라 할 여론이, 그 여론을 알리고 편집하고 만들어내는 신문이, 그리고 그 소속 기자들이 저 지경이다.

우리에게 표준은 아직 요원하다.

ps. ‘표준’ 대신에 좋은 낱말이 뭐가 있을지 고민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