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줄놓 6; [만물상] 영어와 일본인

December 12th, 2008 | by doccho |

일본 메이지유신 주역으로 초대 문부장관을 지낸 모리 아리노리(森有�)는 외교관으로 영국·미국 등에서 살았던 경험을 토대로 1873년 ‘일본의 교육’이라는 책을 썼다. 그는 서문에서 “일본어를 없애고 온 국민이 영어를 배우자”는 파격적 주장을 폈다. 추상어가 부족하고 한문에 너무 의존하는 일본말을 갖고선 서양 문물을 도저히 일본 것으로 만들기 어렵다는 얘기였다.

▶자유민권사상가 바바 다쓰이(馬場辰猪)가 모리의 ‘영어 공용론’을 반박하고 나섰다. “영어가 일본인을 두 계급으로 분열시킬 것”이라고 펄쩍 뛰었다. 영어를 쓰는… [From [만물상] 영어와 일본인]

과거 일본, 그것도 아주 먼 옛날 얘기를 읽고 있자니 요즘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런 엉터리 주장이 부끄럽고 나아가서 우리는 어째 이제야 하게 되었는지, 참담한 심정이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 때 주장했던 내용을 우리는 지금, 오늘날 ‘지껄이는’ 자들이 있다니 말이다.

히로부미 얘기와 이번 노벨상 수상자 도시히데 얘기를 섞어서 이상한 결말로 이끈다. 영어 공용화론에 이어 일본을 이끌어 간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영어로 인해 참담한 경험을 하고 후회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신문사의 기자란 자의 논리가 참 가당찮다. “평생 외국도 못 나가 여권도 없었다.”라고 적고 있다. 평생 외국을 나가지 않아 여권조차 없었다라고 했다면 나았을까 모르지만, 어쨌거나 저런 기본적인 논리 전개도 못 하니, 바로 오늘 우리 사회의 ‘기자 양반’, 그것도 1등 신문 기자답다.

이어 이 ‘기자 양반’은 일본 명문대 정치학과 학생의 발음을 문제 삼는다. 그러면서 황급히, 허겁지겁 세 문장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마무리 짓고 만다. 그나마 이전까지는 어디서 본 내용을 근거 삼아 얘기하지만 마지막 세 문장은 그저 자신의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 뺨을 치는지, 큰 코를 누가 다치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도 한번 감상과 ‘전하는 말씀들’에 의존해서 얘기해 보자. 12년 만에 온 미국은 어러모로 달라진 모습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일본인들을 볼 수 없는 게 가장 큰 일 중에 하나다. 듣기로는 일본인들은 무리 지어 다니지 않아 눈에 잘 띄지도 않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대거 일본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캘리포니아에서 오래 산 현지 주민들의 증언이니 근거치로는 박약하다해도 최소한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난 사실을 전해줘서 생생한 현장경험으로 들렸다. 이유야 어찌됐건 난 여기서 일본인을 본 적이, 그간 넉 달동안 한번도 없다. 내 동선이 아주 짧은 그저 학교와 집을 오가는 수준이지만 말이다.

히로부미 시대야, 근대화의 초기니 미국 문물을 위해서 영어 하는 사람들을 육성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헌데 하나 묻자. 그 ‘몰입학교’가 지금 우리처럼 수십 대 일 경쟁률의 ‘그들만의 리그’, ‘두 계급을 나누기 위한’ 학교였는지 말이다. 도시히데도 그렇다. 그가 노벨상 씩이나 받아서 해외에 나가 그동안 못 누린 호사를 누렸는지 모르지만 자신의 언어로 충분히 학문을 세워 결국 노벨상을 받을 정도가 됐다는 사실과 그런 기반이 이뤄진 일본의 환경을 먼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그가 일본말로 강연해도 좋을 노벨상 수상자 강연 아니었을까. 그의 연구 경험을 얻기 위해 거기 모인 사람들이 궁금함을 이기지 못해 질문을 하더라도 당장 일본어를 배울 수는 없고 일일이 통역을 거치기도 어렵고, 무엇보다 영어를 ‘내지르면’ 다 알아들어야 하는 이상한 국제적인 힘자랑 때문에 그가 당혹했던 건 아닐까? 그가 “반쪽”을 언급하면서 혹시 눈가에는 슬며시 웃음이 묻어 있지는 않았을까?

우리 현실이 근대화 초기의 일본이라면 혹시 모르겠다. 정보를 얻을 수도 없고 도시 영어를 하는 자도 없어 나라가 꼭꼭 문이 닫혀 우리끼리 우물 안 개구리마냥 하늘만 쳐다보며 사는 때라면 혹 모르겠다. 해도해도 다 할 수 없는 우리 말로 된 학문 성과를 더 널리 알리고 싶어서 영어를 익혀 더 널리 세상을 위하자는 큰 의지가 있다면 또 모르겠다.

이 준 논설위원. 도대체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은 뭔가? 정신 줄은 일찌감치 놓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도대체 당신이 그 줄을 놓고 대신 잡은 줄은 뭔가? 혹 국어로 하는 논리 전개가 박약한 것으로 미뤄볼 때 당신이 잡은 줄은 ‘영어 발음 줄’, 혹은 ‘퇴직 후 명함 찍어 영어 힘자랑 강사할 줄’ 정도는 아닌가?

못 알아 들을테니 분명히 말해 준다. 영어 몰입 교육. 웃기시고 있지 좀 마라, 제발. 정말 머저리 같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대꾸할 가치가 있어야 뭔 논리라도 섞어줄텐데 그냥 답이 없다. 그래도 발행하는 글이니 하나 더 묻는 걸로 끝낸다. 그래서 얻는 게 뭔데? 왜 질문만 하냐고? 이게 지금 내가 수천 만원 들여 배우고 있는 그 소위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이란다. 답하는 자 스스로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진리의 길로 스스로 다가갈 수 있는 것이란다.

일본인 네 명이 노벨상을 받는다지. 참 부럽다. 참, 고 은, 황석영이 노벨상 후보로만 언급되고 수상을 못 하는 이유를 혹시 그들이 작품을 영어로 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지금 상태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로 보이니 말이다.

ps. 이 준. 이렇게 외자 이름은 성과 떼어 쓰는 게 맞는단다. 당신 이름이나 좀 잘 쓰고 논설이니, 기사니 해 주기 바란다. 꼭 이럴 때 한글은 맞춤법이 어렵다고 하지? 맞춤법 안이 언제 개정됐는지도 한번 알아보기 바란다. 10월 9일이 빨간날인지 아닌지 정도에 관심을 갖는 조선일보가 아니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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