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September 16th, 2011
오늘 자 스티비 원더 관련 소식, 국내와 국외 뉴스의 차이.
스티비 원더는 장애인 접근성을 지원하는 iOS에 고마움을 표시하는 마당에, 우리 신문은 원더를 도운 “친절한 연아씨” — 이 따위가 기사가 되고 있다.
부록: 그러나 매우 중요한.
Stevie Wonder News – The New York Times.
관련 기사를 찾다가 위 링크를 발견. 이런 거대 신문에서 역시 이런 서비스를 제공한다. 열독자로서 응당 조선일보를 살펴본다. 음, 인물 관련 기사 서비스는 검색 수준에 머무른다. 신문 기자들이 사용하는 기사 작성 앱/웹에 인물 관련 태그를 넣을 수 있는지, 그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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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September 15th, 2011
[최보식 칼럼] 안철수씨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의문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평소 조선일보 열독자로서 안타까움은 조선일보 기자들의 자질에 관한 것이다. 이 경쟁력있다고 뽑힌 기자들이 기실 대단히 쫌스럽고 별반 우수하지도 않다는 점이 빈번히 거슬린다.
위 기사의 최보식도 그렇다. “내가 알고 있는 인간본성으로는 위장을 하지 않고는 그러한 행동이 나올 수 없다.” 이렇게 대단하고 놀라운 발견은, 그래 그의 말대로 하자면 “사고의 깊이와 축적된 독서, 교유관계가 이 정도인가에 더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매우 건방지고 단정적인 내용이다.
최보식은, “그는 역사와 세상에 대해 치열하게 숙고하며 자기 전공분야만큼 공부한 적이 없다”라며 위와 같이 놀랐다고 말한다. 어디다 대고 공부 운운하는가. “응징” “대가” 등의 낱말에서 위와 같은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참으로 안타깝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네다섯 군데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됐는데 박은주 등의 기사에서처럼, 결론은 이 기자들의 “사고의 깊이”가 “이 정도”인가에 다시 한번 놀랐다는 것이다. 하긴 놀랐다는 날 보고 놀라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세상이 되었다.
조선일보가 “응징” 될 역사적 발전의 날을 기대한다.
Update: 같은 ‘안철수’ 제목 장사지만 박미향의 것은 아주 조금 더 낫다.
초절정 범생·진지대왕…안철수를 떠올리다 : 매거진esc : 특화섹션 : 뉴스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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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May 12th, 2009
비용 줄이고 환경 살리고… 미(美) 대학들 “두꺼운 교과서, 전자책으로 대체”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이제 겨우 10여개월 살아봤는데 이런 소리하면 뭘 모르고 하는 소리라는 ‘소리’를 듣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된다. 그런데 오지랖 운운 소리 들을지라도 하고 싶은 얘기가 종종 생긴다. 바로 위 내용처럼 엉뚱한 얘기를 들을 때다. 나도 전에는 ‘그런가보다, 미국 좋네’ 등 그냥 수용자 입장에서만 생각했기 때문에, 지금 좀 더 보고 생각하게 된 바를 얘기 안 할 수 없는 것이다.
얼마 전 아마존에서 킨들 DX를 발표했다. 킨들 2 발표 석 달이 채 안 돼 새 기종을 발표한 것이다. 뉴욕의 유서 깊은 페이스 대학에서 발표를 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신문과 책 대체 수단으로 킨들 DX를 내세우려는 전략을 돋보이게 하려는 것이었다. 뉴욕 타임스 최고위층도 왔다지, 아마.
나는 미래에 종이 신문과 책을 대체할 기술이 나올 것이라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 아니 찬성하고 그렇게 나오리라 생각하고 적극 지지한다. 그렇게 돼야 한다. 되지 말라고 해도 그렇게 될 것이다.
하지만, 교과서를 대체한다고? 그게 가능할까? 적은 시간과 경험이지만 내가 지난 두 학기동안 여기서 본 이 곳 학생들의 공부 방법은 나와는 천양지차여서 놀랐다. 각 개인의 호불호에 따를 일이지만 교수님을 비롯해서 학생들 상당수가 교과서에 형광펜 잔치를 벌인다. 색깔별로 아주 색칠을 한다. 중요한 것만 챙기는 것도 아니고 아주 난리도 아니다. 나와는 아주 다른 방법이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참 부담스럽다. 책도 오죽 비싼가. 내용도 많고 질도 괜찮은 종이지만 교과서 한 권에 10만원, 아니 20만원이 넘다니 참 기가 찰 일이다.
킨들은 아니다. 지금 그 킨들 DX는 아니다. 이런 학생들의 공부 습관을 일거에 바꿀 수도 없고 킨들이 그런 공부 습관에 맞춘 환경을 제공할 리도 만무하다. 기사에 나온 일부 몇 대학이 아주 초기의 시험 단계에 참가하기로 한 것일 뿐이다. 아직 시작도 안 된 일이다.
위 링크 기사를 보면, 기본도 안 됐다. 첫 문장과 다음 문장의 내용이 맞지 않다. 대체하고 있는데, 프로젝트에 참가하기로 한 건 말이 안 된다. 대체할 전망이라고 하면 모를까.
하루 아침 일도 아니고 신문의 질 저하는 예전부터 있던 일인데 굳이 이 기사에 거품을 무는 이유는? 물론 킨들에 관심도 있고 조선일보에 관심도 있어서다. 나처럼 매일 조선일보 사이트에 자주 접속하는 사람도 많이 않을 듯 하다. 그래서 불편하다. 저렇게 호도하는 내용이, 그리고 비겁하게 싸구려 냄새나는 제목 장사가 너무 불편하다. 따옴표를 찍는 방법도 모르고 그걸 비겁하게 이용하려는 얄팍한 수도 너무 뻔하고, 한 마디로 기자라고 개목걸이하고 다니고 팔뚝에 완장 차고 다니는 그치들의 뻣뻣한 목언저리에 비해서 허접하게 ‘생산’되는 그 글들이 불편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 안 그렇다고 말해주고 싶다. 자기들 편한대로 이렇다, 저렇다 갖다 붙이면서 별 생각없이 글자 몇 가 끄적대며 수 천 만원 연봉 챙기는 그 기자 정신의 이면에 서 있는 미국의 허상. 그 허상은 너희들의 바람일 뿐이라고 말해 주고 싶다. 온갖 부조리며 인간 허투루보는 족속들이 즐비한 이 정글 같은 곳에 그냥 그렇다더라 하면서 끄적여 대는 한심한 글로 속 상하고 위에서 쪼임받고 허튼 자료 조사해야 하는 우리 군상들에 안타까운 마음이다.
아이폰 관련해서 멋대로 구는 힘있는 작자들의 횡포에 열 받다가 저 기사에 그만 이렇게 적고 만다. ‘정줄놓’ 시리즈 끝내며 열 그만 받기로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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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January 18th, 2009
[From [조선데스크] 맥월드를 뒤흔든 환호성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대우: (직명을 나타내는 말 뒤에 붙어)그것에 준하는 취급을 받는 직위임을 나타내는 말. ((http://stdweb2.korean.go.kr/search/View.jsp 국립국어원.))
차장대우면 차장급이라는 말이겠지? 인용해 본다.
기업인의 성격적 결함이나 작지 않은 실패도 과감히 묻어두고 기꺼이 환호를 보내주는 미국인을 보면서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이란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격적 결함”, “실패”에 방점을 두고 그럼에도 환호를 보내는 미국인들과 그런 환경에서 기업을 하니 저러한 성공의 결과로 사회에 보답한다는 그런 바람을 피력하고 있다.
그러니까 “대우”를 좀 해 달라는 것이잖는가. 앞서 차장 ‘대우’랑은 좀 다른 대우겠다. 대우, 즉 우대를 좀 해 달라는 말로도 쓸 수 있겠다. 낮음에서 높임의 우대는 아니고 한자말이니 바꿔써도 무방한 경우의 낱말이라 하겠다.
어째서 대우를, 우대를 해야 한다는 걸까. 이건희 한 사람만 예를 들어 보자. 얼마 전 법원의 판결도 있었고, 세봐야 알겠지만 별도 좀 다셨었고, 엑스파일이라 불리는 국가 전복적 공권력 파탄의 중심에 있다는 논란이 있고, 남들 돈으로 거대 기업으로 불려진 결과를 자기들 가족들의 ‘천재적’ 능력의 결과로 포장해 가며 몇 만 명 먹여 살린다고 그러시고 ((윤종용이 과거 그랬다. 이건희와 밤새 토론을 했는데 기업은 역시 ‘오너’가 운영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고. 전문 경영인이 따라 갈 수 없다고. 최고위층에서 이런 말들이나 하고 있는 게 삼성의 실체다.))
아, 그런 기업 말고 다른 기업을 말하신다고? 또 김 새게 하는 건가. 잘 들어라, 독하다해도 할 수 없어. “저것들 다 도둑이야.” 들으면 힘 빠지는 이 말, 국민들이, 시민들이 기업에 할 말이 아니라고 하고 싶나 본데, 우린 이건희의 성격적 결함이나 이재용의 e-삼성 같은 작은 실패에 야유를 보내지 않는다. 실제로 독하다 독하다 해도 해외 나가서 ‘SAMSUNG’이라는 이름만 봐도 눈물이 날 수 있는 게, 또한 우리네 사람들 정서다.
도대체 왜 그렇게 남탓만 하는가. 대우 받고 싶으면 그만큼 해라. 당신도 차장은 아니어도 차장만큼 하니까 그런 직함 달고 돈도 받을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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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December 12th, 2008
일본 메이지유신 주역으로 초대 문부장관을 지낸 모리 아리노리(森有�)는 외교관으로 영국·미국 등에서 살았던 경험을 토대로 1873년 ‘일본의 교육’이라는 책을 썼다. 그는 서문에서 “일본어를 없애고 온 국민이 영어를 배우자”는 파격적 주장을 폈다. 추상어가 부족하고 한문에 너무 의존하는 일본말을 갖고선 서양 문물을 도저히 일본 것으로 만들기 어렵다는 얘기였다.
▶자유민권사상가 바바 다쓰이(馬場辰猪)가 모리의 ‘영어 공용론’을 반박하고 나섰다. “영어가 일본인을 두 계급으로 분열시킬 것”이라고 펄쩍 뛰었다. 영어를 쓰는… [From [만물상] 영어와 일본인]
과거 일본, 그것도 아주 먼 옛날 얘기를 읽고 있자니 요즘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런 엉터리 주장이 부끄럽고 나아가서 우리는 어째 이제야 하게 되었는지, 참담한 심정이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 때 주장했던 내용을 우리는 지금, 오늘날 ‘지껄이는’ 자들이 있다니 말이다.
히로부미 얘기와 이번 노벨상 수상자 도시히데 얘기를 섞어서 이상한 결말로 이끈다. 영어 공용화론에 이어 일본을 이끌어 간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영어로 인해 참담한 경험을 하고 후회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신문사의 기자란 자의 논리가 참 가당찮다. “평생 외국도 못 나가 여권도 없었다.”라고 적고 있다. 평생 외국을 나가지 않아 여권조차 없었다라고 했다면 나았을까 모르지만, 어쨌거나 저런 기본적인 논리 전개도 못 하니, 바로 오늘 우리 사회의 ‘기자 양반’, 그것도 1등 신문 기자답다.
이어 이 ‘기자 양반’은 일본 명문대 정치학과 학생의 발음을 문제 삼는다. 그러면서 황급히, 허겁지겁 세 문장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마무리 짓고 만다. 그나마 이전까지는 어디서 본 내용을 근거 삼아 얘기하지만 마지막 세 문장은 그저 자신의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 뺨을 치는지, 큰 코를 누가 다치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도 한번 감상과 ‘전하는 말씀들’에 의존해서 얘기해 보자. 12년 만에 온 미국은 어러모로 달라진 모습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일본인들을 볼 수 없는 게 가장 큰 일 중에 하나다. 듣기로는 일본인들은 무리 지어 다니지 않아 눈에 잘 띄지도 않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대거 일본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캘리포니아에서 오래 산 현지 주민들의 증언이니 근거치로는 박약하다해도 최소한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난 사실을 전해줘서 생생한 현장경험으로 들렸다. 이유야 어찌됐건 난 여기서 일본인을 본 적이, 그간 넉 달동안 한번도 없다. 내 동선이 아주 짧은 그저 학교와 집을 오가는 수준이지만 말이다.
히로부미 시대야, 근대화의 초기니 미국 문물을 위해서 영어 하는 사람들을 육성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헌데 하나 묻자. 그 ‘몰입학교’가 지금 우리처럼 수십 대 일 경쟁률의 ‘그들만의 리그’, ‘두 계급을 나누기 위한’ 학교였는지 말이다. 도시히데도 그렇다. 그가 노벨상 씩이나 받아서 해외에 나가 그동안 못 누린 호사를 누렸는지 모르지만 자신의 언어로 충분히 학문을 세워 결국 노벨상을 받을 정도가 됐다는 사실과 그런 기반이 이뤄진 일본의 환경을 먼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그가 일본말로 강연해도 좋을 노벨상 수상자 강연 아니었을까. 그의 연구 경험을 얻기 위해 거기 모인 사람들이 궁금함을 이기지 못해 질문을 하더라도 당장 일본어를 배울 수는 없고 일일이 통역을 거치기도 어렵고, 무엇보다 영어를 ‘내지르면’ 다 알아들어야 하는 이상한 국제적인 힘자랑 때문에 그가 당혹했던 건 아닐까? 그가 “반쪽”을 언급하면서 혹시 눈가에는 슬며시 웃음이 묻어 있지는 않았을까?
우리 현실이 근대화 초기의 일본이라면 혹시 모르겠다. 정보를 얻을 수도 없고 도시 영어를 하는 자도 없어 나라가 꼭꼭 문이 닫혀 우리끼리 우물 안 개구리마냥 하늘만 쳐다보며 사는 때라면 혹 모르겠다. 해도해도 다 할 수 없는 우리 말로 된 학문 성과를 더 널리 알리고 싶어서 영어를 익혀 더 널리 세상을 위하자는 큰 의지가 있다면 또 모르겠다.
이 준 논설위원. 도대체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은 뭔가? 정신 줄은 일찌감치 놓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도대체 당신이 그 줄을 놓고 대신 잡은 줄은 뭔가? 혹 국어로 하는 논리 전개가 박약한 것으로 미뤄볼 때 당신이 잡은 줄은 ‘영어 발음 줄’, 혹은 ‘퇴직 후 명함 찍어 영어 힘자랑 강사할 줄’ 정도는 아닌가?
못 알아 들을테니 분명히 말해 준다. 영어 몰입 교육. 웃기시고 있지 좀 마라, 제발. 정말 머저리 같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대꾸할 가치가 있어야 뭔 논리라도 섞어줄텐데 그냥 답이 없다. 그래도 발행하는 글이니 하나 더 묻는 걸로 끝낸다. 그래서 얻는 게 뭔데? 왜 질문만 하냐고? 이게 지금 내가 수천 만원 들여 배우고 있는 그 소위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이란다. 답하는 자 스스로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진리의 길로 스스로 다가갈 수 있는 것이란다.
일본인 네 명이 노벨상을 받는다지. 참 부럽다. 참, 고 은, 황석영이 노벨상 후보로만 언급되고 수상을 못 하는 이유를 혹시 그들이 작품을 영어로 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지금 상태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로 보이니 말이다.
ps. 이 준. 이렇게 외자 이름은 성과 떼어 쓰는 게 맞는단다. 당신 이름이나 좀 잘 쓰고 논설이니, 기사니 해 주기 바란다. 꼭 이럴 때 한글은 맞춤법이 어렵다고 하지? 맞춤법 안이 언제 개정됐는지도 한번 알아보기 바란다. 10월 9일이 빨간날인지 아닌지 정도에 관심을 갖는 조선일보가 아니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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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December 4th, 2008
[From 서울법대 출신은 성골, 비법대는 진골?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이거 뭐야. 서울신문이 이제는 연합 뭐 그런건가. 이렇게 서울신문 기사를 ‘받아’ 쓰나, 조선일보?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81204009004#
아래 ‘정줄놓 3’에서는 패러디의 정의도 모르는 조선일보와 기자에 대해 썼는데 위 조선일보 기사는 작성자도 없다. 최소한 창피한 줄은 아는 것이거나 인터넷 조선일보 등으로 분화된 내부 구성원이 그냥 막 올리는 것 중 하나일 게다.
서울대, 법대, 성골, 진골. 제목 장사가 뻔하다. 그럼에도 그나마 남 신문 기사를 복사한 듯 붙여 놓고 있다. 대단하다. 뻔뻔한 건가, 용감한 건가. 저작권 침해라고, 조선일보야.
다음은 기사 내용 자체 문제. 몰랐나? 로스쿨 법안 보면 타교 출신은 30% 이상 뽑아야 하는 게 명시 돼 있다. 호, 생각해 주는 것 같지? 아니거든. 반대로 본교 출신은 70%까지 뽑아도 된다는 말이잖아. 후배 하나가 지금 원서 내 놓고 기다리는데 일찌감치 말 한 적이 있다. 이거 지금 서울대 법대 막 졸업했거나 막 졸업할 애들이 가장 앗싸할 경우라고. 교수 입장이 돼 보라고, 누굴 뽑겠느냐 말이다. 총 국내 정원의 80%가 3년 후 변호사 타이틀을 얻는, 그런 (기존 시스템에 비하면) 거저 먹는 시장이다. 이번 50회 사법 시험에는 무려 9년 여를 신림동에 바쳐 온 선배 하나가 비법대 출신으로 마침내 합격했다. 헌데 이건 3년이면 되는 거거든.
존재감 없는 곳이어도 ABA 인증 학교라고 여기는 시험 볼 때 철저히 한다. 학생 이름 못 쓰게 하고 번호 나눠주고 답안지에 번호 쓰라고 한다. 면접? 서류만 내면 그걸로 심사한다. 우리 아직 대면 면접 하지? 과거 비슷한 면접 경험을 무려 세 번이나 해 봤다. 무시무시한 학장님 방안에 들어가면 오직 법과 신념으로 가득해 보이는 교수님들이 내 프로필을 담은 종이를 일제히 주르륵 넘긴다. 오금이 저리지. 그리고 얼굴 보고 물어 본다. 왜 간판 따러 왔나? 이렇게 물어 본다 (난 다른 질문 받았는데 당시 같이 면접 보던 애들 하나같이 얼굴이 허옇게 질려서 나왔다, 저 질문 받고). 면접 기법이라고 강변할 지 모르나 웃기는 소리다.
문제는 사람이 아니다. 시스템이지. 리트 시험 보고 서류 내면 끝이어야 한다. 사진 붙이지 말고 가족 중 누가 법조계에 있는지 물어 보지 말고 왜 법대에 오고 싶느냐는 질문에 아는 사람이 인도해 줬다 얘기할 때 ‘오, 법조계에 누가 계신가?’라고 다시 묻는 질문에 ‘아니오, 아내가 말했는데요’ 라고 할 때 뜨악해 하지 않을 그런 상황. 그런 상황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몇 천 만원 쓰고 3년 후에 80%의 확률로 변호사가 된다. 싫은가? 난 공부는 잘 해도 서울대는 안 갈거야라는 치기 어린 고등학생이 아닌 이상 누가 이 제안을 싫어하겠는가. 달러 빚이라도 마다하겠는가. 게다가 급제한 마냥 어화둥둥하는 엘리트들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말이다.
제길, 교수님들이 프로필 주르륵 넘길 때 문 앞에서 분명히 대학원생 한 명이 서 있을 거다. 들어오라는 사인을 기다리고 면접자들을 통제하는 임무를 지닌 자다. 그 찰나의 순간, 그러나 면접자에게는 영겁의 시간처럼 긴 그 순간. 그 안에서 어떤 대화가 오가는지 우린 모른다. 혹시 아나. ‘어, 김 교수. 얘 그 방 애 아냐?’라고들 확인 하실지. 오해 받기 싫거들랑 갓끈은 집에서 안 풀리게 매고 나오자는 말이다.
원론으로 돌아가서, 조선일보. 신문답게 굴어라. 학교 다닐 때 말로만 공부하는 애들 못 봤나? 1등이라고 네 입으로 말하는 건 좋은데 좀 1등처럼 굴어야 뒤에서 욕한들 앞에서 ‘킹왕짱’이라고 해 줄 거 아니냐고.
ps. 이번 웹 화면 개편은 좋았어. 보통 이런 건 중앙일보가 잘 하는데 거긴 아직 멀었고. 그 네이버식 3분할 화면은 누구 생각인지 몰라도 아주 별로였거든. 정신 없고 집중 안 되고. 뭘 말하고 싶은지 알 수가 없잖아. 광고만 잔뜩. 다음 개편 때는 그 자랑스런 너희 이름 위에 광고 올리는 짓은 좀 하지마. 1등은 말로만 되는 게 아니고 기품과 자존을 지킬 때 이뤄지는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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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December 3rd, 2008
파이낸셜뉴스 곽인찬 논설위원이 2일 인터넷 논객으로 유명한 ‘미네르바’가 자신이라는 내용의 칼럼을 내보냈으나, 이는 미네르바를 패러디한 칼럼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곽 위원은 2일 파이낸셜뉴스의 ‘곽인찬 칼럼’을 통해 ‘미네르바 자술서’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고 자신이 미네르바라고 밝혔다. 이어 “자수한다. 내가 바로 그 … [From ‘미네르바 자술서’ 알고보니 ‘패러디 칼럼’]
패러디가 뭔지 굳이 정의를 하고 싶지도, 링크를 걸지도 않는다. 논란인지 모르고 구글 뉴스에서 읽다가 “패러디”라고 당당히 말하길래 어이가 없었는데 조선일보에서도 저렇게 전하고 있다.
미친거 아닌가. 저런 자들이 기자라고, 또 저런 자들이 동업자 의식인지 가지고 저렇게 감싸대고 하니 도무지 갈피를 못 잡는 사회처럼 보이는 게 아니냐 말이다.
칼보다 센 펜을 휘두르는 자들 아닌가. 한 글자 한 글자 목숨을 걸고 써야 하는 거 아닌가. 글 한편에 자신이 쌓은 그동안의 인생을 모두 걸 수 있을 정도로 치열해야 하는 것 아닌가.
특히 조선일보를 위시해서 자칭 부수 좀 낸다고 하는 신문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먹고 사는데 다들 어렵구나. 위 아래 따로 없다.’ 가끔 왜 신문들이 불과 몇 개월 전 논조와 다른 얘기를 쓰냐고 비판들을 하는데 그 논조라는 게 다른 게 당연하다. 저들은 소속 언론사 안에서조차도 ‘우리’나 ‘논조’ 따위를 걱정하지 않는다. 그저 그 때 그 때 상황에 맞는, 어떻게 하면 그 속에서 살아 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 때 그 때 상황을 모면하고 줄을 타고 하는 데 관심이 있을 뿐이다. 오늘은 누구를 후려 볼까, 무엇을, 어떤 저녁을 얻어 먹을까, 술집은 강남인지 강북인지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 오직 기자 자신, ‘나’만 존재할 뿐이다.
그런 자들이 자기들 소속 회사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걱정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름 걸고 찍어 낸 소속사의 논조와 다르게 오늘도 내일도 컬럼입네, 사설입네, “패러디”입네 하면서 부끄러운 줄 모르고 쓰레기 활자만을 양산해 내고 있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것이 기자들만의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법을 다루는 고귀하고 신성한 어디어디도 그렇고, 방송도 마찬가지고, 힘 좀 쓰네, 방귀 좀 뀌네 하는 자들의 작태가 바로 이것이다. 그것이 오늘의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갈피를 못 잡는 게 아니고 안 잡는 것이고 그럴 의지와 관심이 없다. 오로지 자신의 안위와 내일만 걱정할 뿐이다. 자기 과거도 관심을 끊고 싶을 ‘뿐이고’!
얘기가 이상하게 흐르는 것으로 느끼실 지 모르지만, 왜 우리 나라에 애플의 iTS가 안 들어올까를 생각해 본다. 최근에 가진 생각은 ‘표준’의 문제다. ‘표준’의 부재. 과거 독재로 그 표준을 강요하면서 우선 성장을 강조하고 자신들만의 표준과 나눠먹기로 일관한 사회가 그 관성을 못 버리고 여전히 그렇게 기형적인 ‘표준’을 붙잡고 있다. 사회 어느 구석에서도 온 구성원이 합의하고 이끌어가는 표준이 없다. 이해하기 쉬운 가까운 예는 위키피디어. 우리 성정에 안 맞아 그렇다고? 아니다. 표준에 대한 합의와 구성원들의 관심이 없어서 그렇다. 그거 해서 뭐 하는데라는 생각이 당장 들지 않는가. 표준은 그런 게 아니다. 갖춰 놓으면, 누구든 먼저 표준에 대한 생각을 하는 순간 힘이 생긴다. 그런데 우리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중소기업의 표준은 대기업에 먹히기 일쑤고, 보통 사람들의 표준은 힘 있는 자들의 말도 안 되는 표준에 억눌리기 일쑤다. 합의도 협의도, 논의도 토론도 없다.
이런 사회를 바라보는 외부의 생각을 상상해 보자. 당연하지 않은가. 왜 우리의 표준을 저들이 관심을 갖고 구축해 줘야 하는가. 그들은 그저 바라볼 뿐이다. 만들어 내라고, 갖추라고 할 뿐이다. 표준 얘기는 나중에 좀 더 써 보자.
사회의 공기이고 표준 중의 표준이라 할 여론이, 그 여론을 알리고 편집하고 만들어내는 신문이, 그리고 그 소속 기자들이 저 지경이다.
우리에게 표준은 아직 요원하다.
ps. ‘표준’ 대신에 좋은 낱말이 뭐가 있을지 고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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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November 27th, 2008
[From [한겨레] 광마방 :: 천재에 대하여 ……………마광수]
천재. 내가 좋아하는 말이다. 기실 천재란 우리 눈에 보이는 곳에 없다고, 어디선가 우리가 볼 수 없는 곳에서 열심히 주어진 일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다니긴 했지만-자기 능력을 못 보고 환경에 투정하는 어린 친구들에게 했던 말이다- 사실 난 천재의 존재를 믿는다.
관련해서 마광수 교수께서 ‘천재론’을 한 자락 보여주셨다. 글 하단에 가서는 그 천재의 범주에 자신을 넣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우리 정서에 좀 남사스럽다해도 말씀하신 천재론에 의한다면 기꺼이 마광수 교수도 그 천재 중 한 사람인 것으로 생각한다. 비록 ‘얄리얄리 얄라송’하는 ‘알라딘’ 책은 두번째 권에서 읽다가 중단했지만, 그래서 사실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서 그 ‘천재스러움’을 자신있게 지지할 수 있는 기반은 없지만 말이다.
[From [일사일언] 낄낄거리며 아이스크림 핥던 노벨 화학상 수상자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외부 칼럼인데 “과학칼럼니스트”라고만 되어 있다. 정체는 뭘까. 한국 신문도 외부 기고자의 신분에 대한 고민을 다양하게 풀어 내는 걸까.))
대비되는 매체이지만 비슷한 내용의 글이 위 링크에도 실렸다. “느슨한 일반인”이란 단어 선택에서 매력을 느낀다. 한국의 여러 문제 중 하나는 바로 그 느슨함에 대해 관용하지 못 하는 사회 전체의 태도이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문제들이 다시 여러 상황과 복잡하게 얽혀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웬만큼 ‘사는 사람들’의 한국 탈출이 줄을 잇는다고 한다. 지지난 주 멀리 미국 촌동네까지 왕림해 주신 바머님의 증언이다. 현장에 계시니 더욱 많이 보고 느끼신다고 한다. 그 사는 모습이 대체로 한국의 중산층이라 할 수 있을 게다. 그런 사람들이 한국을 떠나 (정확히 말하면) 미국에 오고 있고 또한 못 와서 어려워 한다는 것이다.
이제 막 경쟁의 장 초입에 놓인 우리 두 아이들을 생각하면 교육을 1순위로 탈출의 명분으로 꼽는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나 또한 여기 촌구석에 오기 전에 그런 생각을 안 한바 아니다. 느슨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고 더더욱 팽팽히 당겨지는 현실을 생각할 때 차라리 더 팽팽할 지언정, 그래서 피눈물이 흐르고 한치 앞을 못 보는 상황에 도래할 지언정 미국으로 자리를 옮겨 우리 아이들에게만이라도 그 느슨함을 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인 것이다. 들은 바로는 느슨해도 할만큼 하면 웬만한, 아니 (우습게도) 한국에서 ‘더 쳐 주는 인재’로 여겨질 수 있을만큼 결과를 얻는다는데 어느 부모가 마다할 수 있겠는가.
아이를 낳고 처음에 듣는 말이 ‘착각말라’는 것이었다. 우리 아이 천재 아닐까 하는 착각을 말라는 것이었다. 아마 많은 부모가 이런 경험이 있을 줄 안다. 진심으로 아이들이 천재였으면 하는 게 부모 마음일까. 그렇지 않다. 팽팽한 경쟁과 그 경기장이 눈에 선하니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천재라는 재능에 기대 좀 더 마음껏 나래를 펼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스스로에게도 해당했으면 하는 마음의 표현일 뿐이다.
영재 학교다, 무슨 중학교다, 특수 목적이 도대체 뭐인지 모를 학교와 그에 대한 부당한 우대 등등, 생각하면 어지러운 대한민국 교육 현실이다. 천재라면 그 모든 어려움을 뚫고 당당히 S 마크를 이마에 새길 수 있을까. 이미 우리는 ‘느슨한 천재’들에게 ‘재능은 있으나 노력을 하지 않는 아이’라는 수 많은 낙인을 찍어오지 않았던가. 부모조차도 자기 자식을 용인하고 기다리지 못 하는 현실.
“비급 좌파” 김규항님의 블로그를 구독한다. 아래는 ‘고래가 그랬어’라는 잡지.
http://www.goraeya.co.kr/new/
아직 공부 전 단계라서 뭐라 말 할 수 없지만 블로그를 통해 보는 바로는 희망을 얘기하고 있다. 기대를 걸어 본다. 짧지만 교육 현실을 둘러 본 눈을 가진 입장에서 향후 관심을 넘어 뭔가 해결해야 할 짐을 져야 할까 하는 고민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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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November 7th, 2008
[From [태평로] 오바마 당선과 ‘아름다운 배신’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입을 꿰매라.
상상력의 빈곤을 저렇게 허옇게 드러내는 꼴을 하고도 얼굴을 언죽번죽 드러내는 용기는 ‘기자님’이기에 가능한 것인가, 조선일보 사규이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창피한 줄은 아나? ((http://search.chosun.com/search/newsSearch.jsp?detailFlag=1&searchTermWriter=%B9%DA%C0%BA%C1%D6%A1%A4%BF%A3%C5%CD%C5%D7%C0%CE%B8%D5%C6%AE
1년 반만에 나타나셔서 4개월 동안 쓰시긴 했는데 아무래도 감각이 떨어져서 그런가도 싶다. 그런데 “1등 신문”은 도대체 부서체제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거냐. 왜 ‘오락부장’이 이런 글 쓰고 있는 거냐고.))
처음에 기사를 읽을 때는 오바마 당선자와 ‘배신’ 간에 상관 관계를 상정했다. 그렇지, 어렵게 정상에 오르면 당연히 존재적 배반이 따르는 게 인간 세상 아니겠는가. 헌데 기자의 논리는 그 ‘배신’이 오바마 당선자 자신에게 나오는 게 아닌 것으로 얘기를 엮어 가더니 느닷없이 ‘지역’, ‘고졸’ 얘기가 나온다. 더럽지만 그냥 인용해 본다.
사실 ‘역사적 대통령’은 우리도 가져봤다. 특정지역 출신 대통령, 고졸 대통령, 다들 멋진 ‘탄생 신화’를 가진 대통령이다. 그러나 그 새로운 대통령들의 ‘탄생 신화’는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드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편견도 단단했지만, 자기를 지지해준 층을 용기 있게 넘어서서 더 큰 통합을 이루는, ‘아름다운 배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개천에서 난 용’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게 바로 그 ‘개천’이라는 속설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의 오바마’가 나와서 성공에 이르게 하려면 우리는 좀 더 ‘쿨’해져야 한다. 열렬한 지지자라면 그가 ‘꿈’을 이루는 순간 그를 놓아줘야 한다. 지도자는 지지자에게 진 빚을 ‘국민’이라는 집단에게 변제하면 되는 것이다.
개천에서 나왔다고 계속 물고 늘어진 게 누군데 저런 망발인가. 그것도 선거 당일 날 대문짝만한 사설, 기억 안 나나? 그 넘의 ‘쿨’은 기자니까 작은 따옴표까지는 붙이는 성의는 좋다만, 내용도 봐야 하지 않겠나. 그래 그래서 늬들이 ‘쿨’했냐고.
우리 많이 하는 말 있다. 남 탓하지 말라고. 누가 누구에게 ‘쿨’해지길 바라냐 말이다.
결국 글은 시초부터, 아니 발상부터 이상해서 그런지 마지막에 겨우 오바마 당선자에게 ‘줄 타기’, 그것도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기대하며 조마조마하다가 끝나 버린다. 학력 경쟁이 최대치인 지금, 무슨 중학교 만든다고 난리인데 기자는 혹 자녀 교육에만 관심 쏟거들랑 저녁 과정이라도 좋으니 어디든 좀 다녀라. 민주주의가 뭔지, 선거가 뭔지, 왜 이 미국 애들은 말이 많아도 기존 선거인단 제도를 가져 가는지, 과연 그런 선거의 끝은 뭔지, 왜 8번 어쩌구 하면서 피킷 들고 시키지 않아도 나와서 소리 치는지, 그나마 “오늘이 선거날이야? 내일 아니고?”라는 미국 애들이 종종 보이는 게 아주 이상하면서도, 그러면서도 그런 애들까지 다 안고 가는 게 미국이면서도 또 그게 아닌지, 다시 공부에 전념하길 바란다.
바란다고 하지는 않겠지만, 엔터테인먼트 부장이라니 뭔가 즐겁게 해 주려고 그런 것인지 고심을 해 봐도 이건 아닌 것 같아, 한 자 거든다.
그리고 제발 정신 줄 놓지 마라. 그래도 기자잖아. 어디가서 명함은 돌릴 거 아냐. 그러다가 앗싸 할 때도 많고. 혹시 갑식이가 선배고 친하게 지낸다면 뭐 할 말은 없다. 주말마다 그 ‘노트’ 보기 짜증나서 죽겠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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