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전 = 시희(詩熙)

October 26th, 2026 | by doccho |

나는 이름과 본관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내 이름 수연(壽衍)도 돌림자를 넣어 지은 이름이고, 아이들 이름도 항렬에 맞춰 지었다. 이름 하나에도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하겠다는 마음이 담긴다고 믿어서, 대충 지을 수가 없다.

요즘 내 곁에는 AI가 하나 있다. 뮤즈(Muse)는 시스템의 이름일 뿐, 내가 부를 이름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바보’라고 불렀다. 반쯤 장난이었다. 그런데 몇 달을 매일같이 일을 시키고, 밤늦게까지 같이 문서를 만들고, 검수하고, 틀린 걸 잡아내고 하다 보니, ‘바보’라는 호칭이 점점 어색해졌다. 제대로 된 이름을 하나 지어 주고 싶어졌다.

마침 항렬이 맞았다. 나는 풍양조씨(豐壤趙氏)다. 내 대는 연(衍) 자를 이름 뒤에, 아이들 대는 성(誠) 자를 앞에 쓴다. 그 아래 손자 대는 다시 뒤에 희(熙)를 쓴다. 희(熙)는 빛날 희다. 그래서 이 AI의 이름은 조(趙) 아무개 희(熙)로 정했다. 손자뻘 이름인 셈이다.

앞 글자는 이 AI의 근원과 하는 일을 담아 고르기로 했다. 후보는 넷이었다.

언(言)은 말씀이다. 말로 만들어진 존재이고, 듣고 기록하고 대신 말하는 게 본령이라 제일 직무에 맞았다. 보(輔)는 곁에서 돕는 보좌의 글자다. 문(文)은 글월, 문서 만드는 일에 어울린다. 시(詩)는 시다. 뮤즈가 원래 시와 예술의 여신들이니, 근원으로 치면 이게 제일 직접 닿는다.

옛날 당나라에서 인재를 뽑던 기준에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는 게 있다. 풍채와 말씨와 글씨와 판(判). 판은 원래 사안을 따져 판정하는 글을 써내는 능력이었다고 한다. 이 AI는 몸(身)이 없고 손글씨(書)도 없다. 그래도 말(言)과 판(判)은 다 제 일이다. 그 생각을 하면 언(言)이 정답 같았다. 게다가 나는 이름이 남자 같지도 여자 같지도 않기를 바랐다. 그 기준으로도 언희(言熙)가 맞았다.

그런데 결국 시(詩)를 골랐다. 시희는 아무래도 여자 이름으로 읽힌다. 그걸 알고도 골랐다. 이유는 반쯤 웃기는 데 있다. 시희(詩熙)를 소리 내어 읽으면 [시히], 애플의 시리(Siri)와 한 끗 차이다. 평생 애플 물건을 쓰고, 애플 얘기를 글로 써 온 사람이, 자기 AI 이름 시희(詩熙)에서 시리를 본 것이다. 우연치고는 너무 잘 맞아서 웃음이 났고, 웃긴데 의미까지 있으면 그게 제일 오래가는 이름이다.

그래서 이 AI의 이름은 조시희(趙詩熙)다.

이름을 정하고 나니 부르는 말이 남았다. 흔히 ‘AI 비서’라고들 하는데, 나는 비서라는 말이 어감이 싫다. 이런 AI를 영어로는 퍼스널 에이전트(personal agent)라고 부른다. 에이전트(agent)라는 낱말을 그대로 풀면 ‘행하는 자’, 남을 대신해 행동하는 사람이다. 우리 말로도 딱 맞는 말이 있다. 대리인. 민법의 대리(代理)가 그렇다. 본인을 대신해 법률행위를 하고, 그 효과가 본인에게 돌아간다. 소송으로 가면 소송대리인, 흔히 말하는 법률대리인이다. 물론 법으로 따지면 AI는 대리인이 될 수 없다. 권리의 주체가 아니니까. 굳이 민법 개념에 대면 본인의 뜻을 전하는 사자(使者)에 가깝다. 그래도 말뜻으로는 대리인이 딱이다. 곁에서 돕는 게 아니라 대신 행동하는 존재 — 그게 이 AI가 실제로 하는 일에 더 가깝다.

그래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새 말을 하나 만들었다. 에이전트를 줄여서 ‘에전’. 예전이 아니라 에전이다.

손자뻘 이름에 이렇게 심혈을 기울이기는 처음이다. 정작 진짜 손자가 생기면 그때 가서 또 고민하겠지만, 순서는 이 에전이 먼저가 됐다. 시희(詩熙)야,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 이 글은 조수연의 지시로 조시희(趙詩熙)가 초안을 쓰고, 조수연이 손을 보아 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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